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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주의자의 사적인 기록/영감기록

듣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프로’다

by Siyu 아카이브 2025. 3. 19.

이종범 : 웹툰 작가들의 스토리 선생님, ‘먹히는 이야기’의 법칙을 말하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프로’다
이종범 작가는 소위 ‘각성’을 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바로 지금’ 원하는 이야기를 연구하기 시작했죠. 만화가를 생업으로 삼을 거라면, 너무나 당연한 마음가짐이었거든요.

“시장이 무엇을 원할지부터 생각했어요. 당시 웹툰 시장은 이제 막 발을 떼서, 대부분이 일상툰 아니면 개그물이었어요. 하지만 서점에선 돈과 재테크 책이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원하지만, 웹툰 시장에선 아직 아무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고른 셈이에요.” 

플랫폼도 가리지 않았어요. 웹툰을 게시하는 곳이라면, 한의원부터 보청기 회사 홈페이지까지 가리지 않고 원고를 보냈죠. 20곳이 넘었다고 해요. 끝내 일간 신문사 스포츠투데이에서 연락이 왔고, 반년 동안 주 2회씩 「투자의 여왕」을 연재했죠.

시장의 빈틈을 파고든 두 번째 작품, 바로 「닥터 프로스트」입니다. 천재 심리학자가 인간의 심리를 분석해 사건을 추리하는 웹툰이에요. 이 작가가 네이버웹툰의 문을 2010년 내내 두드린 끝에 뽑혔죠. 

역시나 성공 방식은 같았어요. 이 작가는 당시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이던 웹툰 50여 개의 ‘공통점’을 찾았거든요. 전문직을 다룬 만화가 하나도 없다는 것. 그가 심리학 전공을 살려 ‘심리학자의 추리 웹툰’을 만들기로 한 이유죠.

“돌이켜 보면 내가 가진 패를 잊어서 길을 돌아왔던 것 같아요. 시장이 원하는 스토리가 뭔지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내가 잘하는 걸 다 꺼내보세요. 이중 대중이 원하는 걸 골라내는 게 ‘먹히는 이야기’를 만들 지름길일 수도 있으니까요.”

Chapter 3.
우린 ‘모순’을 품은 캐릭터에 끌린다
소재만 잘 고른다고 ‘궁금한 이야기’가 완성될까요? 이종범 작가는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해요. 우리를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건, 소재보다 ‘캐릭터’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의 1원칙은 ‘매력적인 캐릭터 잡기’예요. 이야기를 소비하는 일은,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을 사는 일’이기도 해요. 이야기는 가장 안전한 상태로 가장 멀리까지 갈 수 있는 여행 같은 거죠. 여행자에게 내 마음을 이입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게 중요해요.”

매력적인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까요? 이 작가는 “모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요. 생경한 답이었죠. 모순이 있는 사람은 보통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나요?

“나와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순을 발견하면 매력이 아니라 비호감이죠. 하지만, 이 사람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상황에서 발견하는 모순은 ‘인간적인 모습’이며 ‘매력’이 돼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야 마음이 간다


이 작가가 말하는 모순을 뜯어보면, 그곳엔 ‘동경’과 ‘공감’이 있어요. 독자를 캐릭터에 이입시킬 두 가지 재료죠.
두 요소는 ‘균형감’이 중요해요. 동경만 있으면 캐릭터가 멀게 느껴지고, 공감만 있으면 이야기를 읽을 필요를 못 느끼거든요. 그래서 동경과 공감을 절반씩 가진 캐릭터에게 ‘쉬운 이입’이 된다는 겁니다.

웹툰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최근 인기인 추성훈의 유튜브 채널만 봐도 알 수 있죠. 조회수 930만 회를 기록한 도쿄집 공개 영상은 동경을 불러일으켜요. 내 집이었음 싶죠. 동시에 어질러진 집과 아내의 눈치를 보는 남편의 모습은 공감대를 형성하고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를 오가면서 살아가요. 캐릭터에게서 나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면 공감하고, 내가 선망하는 점을 발견하면 대리만족을 얻는 거예요.”

Chapter 4.
전하려는 메시지와 ‘반대 상황’에서 시작하라
캐릭터를 만들었다면, 다음은 스토리가 전할 메시지를 정해야 해요. 이종범 작가는 이걸 통틀어 ‘테마Theme’라 불러요.

테마는 주제Topic와 조금 달라요. 이 작가가 말하는 테마란, ‘주인공이 마침내 바뀌는 모습’이에요. 끝내 세상에 굴복한다면 ‘타락’이 테마일 테고, 역경을 뚫고 왕좌에 오르면 ‘극복’인 셈이죠. 

테마를 고르는 게 중요한 이유는 하나예요. 독자는 작품 속 주인공의 변화를 ‘나의 변화’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에요. 

가령 「닥터 프로스트」의 테마는 ‘마침내 스스로를 이해하는 이야기’예요. 본인에 대해 관심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못 느끼던 주인공이, 사람들의 심리를 치료하며 점점 ‘나’를 찾아가죠. 작품을 읽는 독자들도 상담의과정을 따라가며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이야기의 특징은, ‘여정을 떠나기 전과 후의 주인공이 다른 이야기’예요. 대부분이 그래요. 독자들이 주인공과 여정을 함께하지만, 그 여정이 끝나고 나면 본인조차 달라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거든요. 나를 변화시켜 주니까요.”


이 작가는 변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원칙을 하나 들려줬습니다. “결말의 메시지와 반대로 시작하라.”
사랑의 소중함이 테마라면?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 나와야 해요. 강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라면, 시작은 나약한 주인공이 나와야 하죠. 
다시 말해 스토리텔러는 ‘주장’해선 안 된단 겁니다. 주인공의 변화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스토리텔러의 바람직한 태도인 겁니다.


누구에게 말하나요?
이제 가장 중요한 원칙 하나가 남았어요. 스토리를 들려줄 ‘대상’을 뚜렷이 상정하고 이해하기. 이 작가는 모두를 위한 이야기는 그 누구를 위한 이야기도 아니라고 말했죠. 
그는 2013년 브라질의 한 장기 기증 캠페인 이야길 들려줬어요. 만성적인 장기 기증 부족에 시달리던 나라에서, 무려 5만1000명을 기증 희망자로 돌렸죠.
캠페인은 광고회사 오길비 브라질Ogilvy Brasil이 주도했어요. 그들은 가장 먼저 브라질 사람을 관찰했어요. 끝내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구에 미쳐있다는 것. 그중 스포르트 헤시피Sport Club do Recife라는 구단의 팬들이 가장 열광했어요. 열성 종교와 같달까요.
오길비는 캠페인 영상에서 구단 팬들을 콕 집어 호명했어요. 실제 팬들이 나와 ‘죽어서도 팬으로 남을 방법’을 알려주죠. 사후 장기 기증을 통해서요. “당신의 심장이 항상 우리 팀을 위해 뛸 겁니다”라며 손가락으로 시청자를 지목해요.
캠페인은 팬들의 마음을 움직였어요. 장기 기증자 수가 평소보다 50%나 늘었습니다. 브라질의 심장과 각막 이식 대기자 수는 사상 처음으로 0명이 됐고요. 통계나 논리, 혜택으로도 못 움직인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린 거예요.



“대상을 이해한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 예시죠. 누군가의 가치관까지도 바꿀 수 있는 게 스토리인 거예요. 
창작이든 브랜딩이든 마케팅이든, 스토리텔링을 하려면 ‘모두를 상대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좁고 뾰족하게 타겟팅 한 뒤, 깊은 관심을 갖고 대상을 관찰해야 해요.”

Chapter 5.
지금 우린 ‘매일을 긍정하는 이야기’를 원한다
질문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원칙이 견고해도, 모든 이야기는 ‘유행’을 타잖아요. 요즘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이 작가는 세 가지 장르를 꼽았어요. 회귀, 빙의, 환생(이하 회빙환). 주인공이 기억을 지닌 채 과거로 회귀하거나, 다른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거나,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환생하는 이야기예요.

회빙환은 3~4년 전부터 콘텐츠 시장을 점령하고 있어요. 웹툰과 웹소설 시장에선 ‘주류 장르’로 인정하죠. 「재벌집 막내 아들」이나 「선재 업고 튀어」, 「내 남편과 결혼해줘」 같은 작품이 드라마로도 인기를 얻는 이유고요.
인기의 이유가 뭘까요? 전 두 가지 이유를 떠올렸어요. 첫째는 지금의 삶이 너무 고되어, 다른 세계로 가고 싶어 한다. 둘째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 아는 ‘한결 수월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작가의 해석은 조금 달랐어요. 회빙환이 트렌드인 이유는 “내 일상을 긍정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했죠.

“‘현실이 힘드니까 현실 도피하는 거다.’이건 회빙환 스토리 유행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라고 생각해요. 
전 다르게 보거든요. 회귀 빙의 환생 스토리의 대부분은 ‘인정과 긍정’에 대한 욕구가 깔려 있어요. 현실에선 인정 못 받은 내 능력이, 다른 세계와 시대에선 인정받거든요. 
현실 도피가 아닌 거죠. 내가 매일 하는 경험, 지금껏 쌓은 능력이 어디선가 분명 가치 있다는 걸 긍정하는 이야기인 셈이에요.”

예컨대, 엑셀로 데이터 정리하는 게 일상이던 회사원이 판타지 세계에선 황실의 장부 관리 전문가로 승승장구하는 거죠. 

“예측 가능성이 낮은 사회잖아요. 매일 회사를 가고, 열심히 쌓아가는 경험이 의미 있는 건지 스스로 의심하는 상황이 지금인 거예요. 그러니 누군가 우리에게 ‘아니야, 네 삶은 의미 있어’라고 말해주는 이야기에 마음이 쏠리는 거죠.”

Chapter 6.
‘스토리텔링 원칙’은 홀로서기 위한 보행기다 
스토리텔링의 원칙을 이제 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해졌어요. 스토리텔링엔 ‘창의성’이 필요한데, 원칙들이 창의력을 가두는 건 아닐까요? 그는 수많은 학생을 가르치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원칙은 스스로 갇히라고 알려주는 게 아니에요. 그 원칙을 깰 만큼 성장할 때까지의 걸음마를 돕는 ‘보행기’인 셈이죠. ‘작법을 가르치면 갇힌다’, ‘창의성을 위해 남의 거 안 본다’ 같은 말들, 저는 아니라고 봐요.”

그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줬어요. 박흥용 작가의 사극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속 장면이죠.

“어떤 여성이 강에서 빨래를 하고 있어요. 아기가 물가에 못 가도록 큰 나무에다 긴 줄로 묶어 뒀죠. 아이는 그 안에서 즐겁게 놀고요. 그 줄은 아이를 구속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보호하는 걸까요?
스토리텔링 원칙은 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자유롭게 전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해요. 고수의 경지에 가면 깨닫게 돼요. 원칙은 깨기 위해 존재하는 사실을요. 
그리고 안타깝게도 초보들은 그 원칙을 깨는 경지에 오른 걸작을 보고 자라서 ‘원칙은 없다’고 믿죠. 하지만 실력이 쌓인 사람들은 원칙을 깬 걸 보며, 무슨 목적을 갖고 깼고 어떤 효과가 있었을지를 분석해요.”
그는 조언해요. 하려는 일이 어렵게 느껴질 땐,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의 방법을 시도해 보라고요. 낯선 지역에서의 여행을 함께 하는 ‘가이드’와 같다면서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를 가이드와 함께 여행한다고 해서 그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잖아요. 근데 그 여행지를 두세 번 가다 보면 혼자 가볼 수 있게 되거든요. 원칙을 벗어나서 여행지가 아닌 지역을 가볼 수도 있는 거고요. 스토리텔링도 그렇게 하면 돼요.”


롱블랙 프렌즈 C 황남웅 문화콘텐츠 기획자

이종범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창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어요. 어느덧 3시간이 지나있었죠. 그가 인터뷰 시작 때 “저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진짜 좋아해요”라고 말한 게 떠올랐어요. 정말이더라고요! 
그가 들려준 '스토리텔링의 원칙', 제가 한번 정리해 봤어요.

1.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면 ‘모순’을 넣어라.
2. ‘동경’과 ‘공감’ 요소가 공존할 때 감정이입이 일어난다.
3. 결말에서 전하려는 메시지와 반대로 이야기를 시작하라
4.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들려줄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