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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주의자의 사적인 기록/영감기록

비트윈스페이스 : 더현대부터 스타필드까지, 초대형 공간 설계자의 원칙은

by Siyu 아카이브 2025. 2. 25.

롱블랙 프렌즈 B 

‘경험 과잉 공급’이라는 말이 나오는 요즘입니다. 매달 팝업 수십 개가 뜨고 지는 시대죠. 브랜드들은 거리로 나와 “일단 경험해 보라”며 행인을 끌어당기고 있고요. 

이런 세상에 한 디자인 회사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좋은 경험을 주려는 건가, 그저 브랜드를 자랑하려는 건가”라고요. 단순히 오고 마는 공간을 찍어내는 건,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면서요. 

도발적인 이야기를 쏘아 올린 곳은 ‘비트윈스페이스Betwin Space(이하 비트윈)’입니다. 2008년 시작해 올해로 17년을 맞은 공간 디자인 회사예요. 

좋은 공간의 비밀을 파고드는 심영규 건축PD가 빌더스 위크Builders Week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김정곤 비트윈스페이스 소장을 소개한다고 합니다. 

시대를 쫓아가는 대신, 시대를 읽고 ‘나만의 것’을 만들려는 사람이 꼭 읽었으면 한다는군요. 도움이 될 거라면서요.

 


심영규 건축PD

비트윈스페이스는 현대백화점과 롯데백화점, 신세계 이마트와 스타필드, CU와 카카오의 플래그십스토어를 디자인했습니다. 최근에는 올리브영N성수와 유니클로 잠실까지 디자인했죠. 하루에 수만 명이 찾는 대형 공간을 150여 곳 넘게 설계해 왔어요.

“익숙한 공간인데 뭐가 특별한가”라고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전 그 익숙함에서 탁월함을 찾습니다. 이들의 설계에는 신선한 충격 대신, 계속해서 찾아오게 하는 힘이 있거든요. 

저는 그 힘이 우리의 ‘기분’을 따라 디자인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제 분석이 맞는지, 김 소장을 찾아가 직접 물었습니다.

 

Chapter 1.
변화에 목말랐던 부안 시골 소년

비트윈스페이스를 만든 김정곤 소장. 그는 어릴 때부터 변화에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변화가 없는 마을에서 자랐어요. 1978년 전북 부안에서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어머니의 벼농사 일을 도우며 살았죠.

다 좋은데 하나가 아쉬웠다고 합니다. 늘 똑같은 환경. 사계절만 바뀔 뿐, 마을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은 그대로였거든요. ‘왜 이렇게 안 변할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TV에 나오는 도시 풍경에 종종 눈길이 갔어요. 항상 건물을 짓고 있고 공간도 다채롭게 바뀌었죠. 단조로운 일상도 사람의 노력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절 설레게 했어요.”

스무 살의 김 소장은 같은 꿈을 가진 고향 친구 오환우 소장*과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둘은 각자 다른 대학의 실내건축과에 들어갔어요.
*비트윈스페이스의 공동창업자. 

하지만 형편은 빠듯했습니다. 학비를 직접 벌어야 했어요. 잘 곳이 없어 주유소에 딸린 단칸방에서 먹고 자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죠.

힘들지 않았냐고 묻자, “모든 것이 새로웠다”고 김 소장은 회상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시공 현장에서 경량* 일을 할 땐 변화의 중심에 있어 좋았고, 교수 연구실에 틀어박혀 최신 건축잡지를 읽을 땐 변화를 만들 방법을 익혀서 좋았다고 해요.
*벽체나 천장을 마감하는 공사. 

“피곤한데도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잘 모른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에요. 남들보다 늦게 배웠고, 전문 지식도 없는데 가만히 있으면 잘하는 친구들을 어떻게 따라잡아요. 그러니 그들보다 덜 자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일해보는 수밖에 없었던 거죠.”

롱블랙과 인터뷰하는 김정곤 소장. 그는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빠듯한 생활에도, “잘 몰랐기에 더 배워야 했다”고 회상한다. Ⓒ롱블랙

Chapter 2.
시대는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김정곤 소장은 시대를 잘 만난 사람이기도 합니다. 2008년 친구 오환우 소장과 회사 비트윈스페이스*를 차린 뒤 일감이 끊이질 않았거든요.
*회사 이름은 ‘사이’를 뜻하는 영단어 비트윈between과 경쟁에서(bet) 이기다(win)라는 중의적 표현을 품고 있다. 

이유가 있어요. 둘이 자리 잡은 곳이 하필 서울 성수동이었기 때문이었죠. 지금과 달리 2008년의 성수동은 방문객이 많지 않은 공장지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김 소장은 이곳을 ‘새로운 건축 소재가 넘치는 곳’으로 바라봤습니다.

“디자이너가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다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돈도 인력도 없으니, 남들이 잘 쓰지 않는 재료를 쓰는 게 경쟁력 있겠다 생각했죠. 그런 재료가 많은 곳이 성수동이었고요.”

두 친구의 일은 종일 성수동을 산책하는 것이었어요. 주물 공장부터 수도 배관집, 수선 가게까지 기웃거리며 공업용 소재를 주워왔죠. 쇠 파이프나 용접봉, 신발 깔창이 사무실에 가득했대요.

이걸 어디에 썼냐고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Industrial Design의 유행을 타면서 쓸모를 찾았습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벽재, 배관이 드러나는 천장, 스테인리스 철재가구가 상업 공간에 속속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준비된 사람을 누가 이길까요. 비트윈은 쏟아지는 의뢰를 해결해 나갑니다. 2011년엔 실내화나 신발 깔창에 쓰이는 EVA 소재로 스무디 킹Smoothie King의 건물 외벽을 채웠어요. 

2014년엔 흰 파이프로 아이스크림 가게 레미콘Remicone의 내·외부를 감쌌죠. 2016년엔 수도 설비와 스테인리스로 뷰티 브랜드 닥터자르트Dr.Jart+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디자인했고요. 

비트윈스페이스가 디자인한 공간들. (왼쪽부터 시계방향)닥터자르트 플래그십스토어, 스무디킹 이대점, 아이스크림 가게 레미콘 신사, 카페 뎀셀브즈. 모두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을 접목했다. Ⓒ비트윈스페이스

배움 : 트렌드는 수명이 짧다

10년간 약 100개 공간을 디자인한 비트윈. 이들의 전성기는 다음 트렌드 앞에서 막혀버렸습니다.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 지고, 2010년대 후반 모더니즘을 재해석한 디자인이 다시 찾아온 거예요. 이전의 거친 질감 대신 깔끔하고 단순한 인테리어가 주목받았죠.

2020년 비트윈도 뼈아픈 실패를 겪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공간이 유행에 따라 사라지는 걸 본 거예요. 2019년 비트윈은 강남역에서 신논현역 사이에 플래그십 스토어 5곳*을 설계했습니다. 하지만 4곳이 1년 만에 문을 닫았죠.
*에스쁘아, 올리브영, 미샤, 아리따움, 데상트.

“왜 실패했는가 돌이켜 봤습니다. 우린 소재에만 집중했던 거예요. 신선한 소재를 갖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죠. 소비자가 그 공간에 관심이 있는지, 다시 오고 싶은지는 생각하지 않고요.”

비트윈스페이스는 한때 강남역과 신논현역 사이 5개의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를 세웠다. 하지만 1년 만에 올리브영 1곳만 남는 실패를 겪었다. Ⓒ비트윈스페이스

 

Chapter 3.
더현대서울 : 질리지 않는 백화점을 위한 ‘기분 디자인’

2020년 김정곤 소장은 체질을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유행에 목매지 말고, 계속 찾아가고 싶은 공간을 만들어보기로 하죠. 그는 그해 종무식에서 20명의 전 직원을 모아두고 선언합니다. 

“눈에 보이는 스타일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경험을 디자인하자.”

그래서 집중한 곳*이 백화점·아울렛 같은 대형 쇼핑몰입니다. 누구나 찾아오는 공간을 더 많이, 자주 오게 만든다면? 트렌드에 흔들리지 않는 비트윈 만의 경쟁력이 될 거라 봤거든요.
*비트윈스페이스는 이전에도 인천공항 제1터미널, 현대 프리미엄 아울렛 등의 디자인을 맡으며, 대형 공간 설계 경험을 쌓아왔다.

“팬데믹이 터진 뒤, 대형 리테일 공간은 그 어떤 곳보다 변화에 목말라 있었어요. 온라인 쇼핑이 흔해진 만큼, 굳이 쇼핑몰에 와야 할 이유를 고객에게 제안해야 했거든요.”

그때 비트윈은 전환점이 된 프로젝트를 만납니다. 바로 2021년에 오픈한 더현대서울의 지하 2층 ‘크리에이티브 그라운드’입니다. 흔한 브랜드 매장 대신, 팝업이나 문화 공간이 자유분방하게 들어가 있죠. 오픈 직후 2030세대의 놀이터로 주목받기도 했어요.

클라이언트의 주문은 간결했습니다. “평범한 백화점처럼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 뭐든 좋으니 새로운 걸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죠.

김정곤 소장은 코로나19 이후 리테일 공간은 의외의 모험을 제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브랜드가 나열된 매장은, 온라인 쇼핑 경험과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비트윈스페이스

오프라인은 예상 밖의 탐험을 선사해야 한다

김정곤 소장은 기존 백화점의 문제부터 파악했어요. 그가 찾은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온라인 쇼핑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 침대에 누워서도 정렬된 상품을 볼 수 있는데, 굳이 백화점에 똑같이 늘어선 매장을 둘러볼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지금까지 쇼핑몰은 ‘원하는 물건을 사게 한다’는 문제 해결에만 초점을 맞췄어요.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오프라인 공간은, 온라인이 주지 못하는 즐거움까지 줘야 한다고 봤죠.”

그래서 김 소장은 선입견을 비틀었어요. ‘길을 잃게 만들어보자.’ 매장을 빽빽하게 두는 대신, 고객이 걷는 길목 구석구석에 이벤트를 심어 탐험한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 거예요.

그래서 만든 게 ‘옴니버스 랜드’예요. 지하 2층을 네 가지 테마의 영역으로 나눴어요. 영역마다 색깔부터 밝기, 점포의 밀도, 장르가 다릅니다. 공간은 하나인데, 마치 네 개의 백화점을 둘러보는 듯한 착각을 주죠. 

“브랜드가 줄지어 나열된 백화점은 한순간에 파악이 돼요. 그럼 다 봤다고 생각하고 다시 안 가게 되죠. 초기 성수동이 신선했던 이유가 뭘까요. 뭐가 나올지 몰라서예요. 골목을 걷다 보면 약국에서 갈비찜 가게, 주택가, 패션 편집샵으로 끊임없이 바뀌잖아요.”

이때 중요한 게 있어요. 고객이 각 구역의 이벤트에 온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김 소장은 각 구역마다 느낄 ‘세 가지 경험’을 디자인했어요.

김정곤 소장은 더현대서울 지하 2층을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각 구역마다 다른 경험을 하도록 디자인했다. 그는 이를 ‘옴니버스 랜드’라 불렀다. 그 이름은 옴니버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다 얻은 영감에서 붙였다. Ⓒ비트윈스페이스

① 매장의 경계선을 지워 부담을 덜다 

김 소장은 먼저 브랜드 매장과 통로의 경계를 없앴어요. 각 구역의 바닥과 통로를 똑같은 타일로 마감했죠. 매장을 감싸는 기둥도 없앴어요. 고객과 제품이 자연스레 만나는 경험을 위해서였죠.

“마치 차도와 인도를 섞은 것과 같아요. 경계선을 없애기만 해도, 사람들은 매장에서 물건을 사야 한다는 부담감이 줄어요. 나도 모르게 매장에 들어와 있으니까요.

예컨대 더현대서울 지하 2층엔 오디오 기기 매장이 있어요. 사람들은 쉬는 곳인 줄 알고 편하게 들어오시죠.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품까지 구경하고요.”

더현대서울 B2 이스트 존. 매장과 통로의 경계를 없애, 고객이 더 자연스럽게 제품을 둘러보도록 했다. Ⓒ비트윈스페이스

② 시선을 흐트러뜨려, 편안함을 주다 

지하 2층 남쪽엔 팝업 행사를 위해 마련한 아이코닉 스퀘어Iconic Square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비워져 있지만, 팝업이 열리면 줄을 선 사람들로 가득 차는 곳이죠. 

그런데 이곳의 바닥 디자인, 조금 요란합니다. 블랙·화이트 다이아몬드 문양의 패턴이 가득해요. 김 소장은 이 디자인에도 의도가 숨어있다고 합니다.

“이 구역은 지하철역과 백화점을 잇는 통로예요. 하루에 2만 명이 넘게 오가는 곳이다 보니 팝업 줄을 서면 사람들과 계속 눈을 마주치게 되죠. 

저는 줄을 선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고 싶었어요. 오래 서 있어야 하는데, 기왕이면 오가는 사람들 눈에 덜 띄어야 부담이 없을 테니까요.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바닥에 현란한 패턴을 깔았죠.”

더현대서울 B2 아이코닉 존. 팝업을 위해 디자인된 이곳은, 흑백의 다이아몬트 패턴으로 방문객의 시선을 분산시켜 공간의 밀도를 높였다. Ⓒ비트윈스페이스

③ 밝기를 낮춰 쉼을 제안하다 

모든 공간이 쇼핑을 제안하면 우린 금방 피로해질 거예요. 김 소장은 센트럴 라운지Central Lounge 구역의 밝기를 한 단계 낮췄어요. 

지하 1층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다 보면 처음 만나는 공간이죠. 짙은 브라운 천장과 기둥을 따라 주황색 조명이 공간을 은은하게 비춥니다.

“다른 세 구역이 밝은 대신, 한 구역은 어둡게 만들어 잠시 쉴 공간을 마련했어요. 스타벅스 리저브와 문구 편집샵, 음악 청음샵을 한데 모은 것도 그래서예요. 마치 호텔의 로비처럼 어딘가로 갈 준비를 하는 거예요.”

한 번에 파악할 수 없고, 구역마다 몰입감을 더하고, 끝내 다시 찾아가게 만드는 공간. 비트윈의 의도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작동하는 중이에요. 이 방식은 2024년 문을 연 더현대대구, 2025년 올리브영의 혁신매장 ‘올리브영N성수’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죠.

더현대서울 B2 센트럴 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2층에 내려온 고객이 가장 처음 맞이하는 공간이다. 호텔 로비를 연상케하는 디자인으로 쉴 공간을 만들었다. Ⓒ비트윈스페이스

Chapter 4.
공간은 모든 세대의 기분도 품을 수 있다

더현대서울이 MZ 성지였다면, 비트윈이 2023년 설계에 참여한 스타필드 수원은 ‘가족’을 품은 곳입니다. 엄마 아빠부터 아이, 심지어 반려견까지 드나드는 공간이어야 했죠. 

이곳에서 비트윈이 맡은 공간은 ‘푸드코트’였습니다. 사실 제가 아는 푸드코트는 쇼핑몰에 꼭 필요하지만, 좋은 경험을 주긴 어려운 공간입니다. 빽빽하게 깔린 테이블,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잡음, 주문 번호 호출 소리로 어수선하니까요.

김정곤 소장은 푸드코트를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쇼핑몰에서 가장 편안해야 할 공간으로요. 그래서 컨셉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로 잡았죠.
*조선 초기 화가 안견이 그린 산수화. 세종의 왕자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낙원을 표현했다. 안개가 자욱한 언덕, 쏟아지는 폭포수, 만발한 복사꽃이 특징이다.

비트윈은 몽유도원도처럼 푸드코트에 여유를 더했습니다. 천장과 기둥, 바닥을 모두 아이보리색으로 통일하고 행잉 플랜트hanging plant와 덩굴 식물을 군데군데 심었어요. 모든 내부 디자인은 곡선으로 마감했습니다. 마치 구름 속의 정원을 연상하게끔 했죠. 

잇토피아는 몽유도원도를 컨셉으로 잡고, 안개 낀 자연의 모습을 곳곳에 녹였다. 푸드코트의 혼잡한 분위기를 차분하게 만들려는 시도였다. Ⓒ비트윈스페이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컨셉만 강조했다면, 기존의 푸드코트와 다를 바 없었을 겁니다. 김 소장은 실제로 방문객이 누릴 경험을 디자인하는 데 집중했어요. 

푸드코트 한가운데 마련한 키즈 구역이 그 결과물입니다. 아이들이 밥 먹다 말고 뛰놀 공간을 따로 마련한 거예요. 어느 좌석에 앉아도 키즈 구역이 눈에 들어오죠. 덕분에 부모들은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어요.

더 어려운 숙제는 펫 프렌들리pet friendly를 구현하는 거였어요. 스타필드는 반려동물과 함께 들어올 수 있지만, 위생법상 식사 공간엔 들어올 수 없거든요. 김 소장은 이걸 ‘야외 테라스와의 연결’로 해결했습니다.

“푸드코트 일부 공간을 테라스로 만들면, 밥을 먹으면서 뛰노는 강아지까지 살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7층 푸드코트와 8층 펫 파크를 잇는 열린 공간이자 중정형 계단실을 만들었죠. 

8층의 바닥 일부를 제거해야 해 건설비가 많이 드는 일이지만,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편안한 기분을 느껴야 다시 올 수 있겠다고 마음먹을 테니까요.”

2024년 문을 연 스타필드 수원은 1년 만에 누적 방문객 1900만 명을 기록했어요. 이들의 설계가 통한 덕일까요? 비트윈은 2027년에 문을 열 스타필드 창원의 디자인도 의뢰받아, 한창 작업 중이라고 합니다.

스타필드 수원 7층 잇토피아에서 8층 펫파크로 연결되는 중정 CG 이미지. 테이블을 둬 반려견과 함께 식사하도록 했다. Ⓒ비트윈스페이스

 

Chapter 5.
무의식을 디자인하는 사람이 트렌드를 이끈다

대형 리테일 공간을 디자인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김정곤 소장에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로 디자이너를 넘어 ‘심리학자’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머릿속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요. ‘나라면 여기서 앉고 싶을 것 같다, 여긴 기대는 게 더 편하지. 여긴 가만히 앉아있는 게 오히려 어색해 보여’라면서요. 그럼 무엇을 어떻게 디자인할지 떠오르죠.”

김 소장은 예를 들어줬어요. 2022년 문을 연 시디즈 플래그십 스토어. 교실을 닮은 공간에 12쌍의 의자와 책상이 간격을 두고 놓여 있어요. 방문객은 자리에 앉아, 책상에 놓인 태블릿으로 제품 설명을 살펴볼 수 있죠.

이런 공간을 만든 이유는 뭘까요? 김 소장은 의자에 앉을 때의 무의식을 건드렸다고 해요.

“보통 의자를 파는 곳은 항상 의자만 덩그러니 두고 있어요. 그런 의자에 앉으면 어딘가 허전하죠. 앞에 책상이 없으니까요. 달리 말해, 의자는 책상이나 식탁과 있어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거예요.”

서울 강남에 위치한 시디즈 플래그십 스토어. 사람들에게 익숙한 교실을 컨셉으로, 책상과 의자를 나란히 놓아 체험하게 했다. Ⓒ비트윈스페이스

최근 비트윈이 공간 리뉴얼에 참여한 롯데리아에도 무의식을 반영했어요. 모든 매장 한쪽에 걸터앉을 수 있는 선반을 설치한 게 대표적이죠.

“패스트푸드는 매장에서 먹는 사람보다 포장하는 사람이 많아요. 만약 내가 포장 손님이라면 어떨까요? 주문 후 앉을 곳이 없어 우두커니 서 있죠. 그럼 공간이 어수선해 보일 테고요.

이들이 살짝 기댈 선반을 만들었더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포장 주문 손님이 모두 선반에 걸터앉으면서 매장이 한결 정돈됐죠.”

김 소장은 이 모든 작업을 ‘무의식 디자인’이라 정의합니다. 평소라면 지나칠 법한 느낌을, 집요하게 의식화해 되묻고 해결책을 찾는 거죠. ‘난 왜 이 물건에 끌릴까?’ ‘난 왜 이곳이 불편하게 느껴질까?’ 같은 질문으로요.

“트렌드도 실은 우리들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생각해요. 우리가 처한 상황, 평소 느끼는 기분이 트렌드에 반영되니까요. 무의식을 장악할 줄 아는 사람은, 트렌드를 쫓아가지 않고 이끌어나갈 거라 생각합니다.”

최근 리뉴얼한 롯데리아의 매장에, 비트윈스페이스는 구석구석 걸터앉는 선반을 달았다. 김정곤 소장은 이 역시 무의식을 건드리는 디자인이라 말한다. Ⓒ비트윈스페이스

Chapter 6.
“우린 생존력이 높은 회사입니다”

디자인 잘하는 회사가 아니라, 생존력이 높은 회사가 되고 싶다. 김정곤 소장이 말하는 비트윈스페이스의 지향점입니다. ‘디자인 잘하기’를 피한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디자이너라면 한눈에 알아볼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고들 해요. 저희는 그런 쪽에 관심이 없어요. 저희가 디자인을 잘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죠. 대신 우리는 ‘생존력’이 강해요. 창업 후 17년간 트렌드가 세 번 바뀌는 동안에도 살아남았으니까요.”

김 소장은 말합니다. 비트윈스페이스가 트렌드에만 갇혀 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요. 그는 요즘 유행하는 카페의 경험을 떠올려 보자고 했습니다. 등받이 없는 의자와 허리를 숙여야 하는 낮은 테이블, 상대의 표정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실내. 이런 건 모두 ‘지나가는 유행’일 수 있다는 거죠.

“팬시fancy하다는 카페에 들어가면, 합의라도 한 듯 불편함을 내세워요. 그 누구도 이런 곳에 10년, 20년을 찾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죠. 언젠가 사라질 디자인을 하느니 꾸준히 가고 싶은 공간을 고민하는 게 생산적이라 생각해요.”

제가 시대를 만드는 ‘빌더스’로 김 소장을 소개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일시적인 트렌드에 목매기 보다, 공간에 머무르는 이들의 기분을 더 신경 쓰는 사람이니까요. 이런 사람이, 이 시대를 더 의미 있게 세워가는 것 아닐까요.

“세상은 앞으로도 다양성에 주목할 거라고 봅니다. 자기 취향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이 변화를 디자이너들이 겉으로 보이는 미학이나 형태만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때 디자이너가 가질 수 있는 무기는, 사람의 기분과 그들이 처한 문제를 고려하는 마음이에요. 트렌드는 바뀌지만, 좋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우리 마음은 변하지 않을테니까요.”

 

 

롱블랙과 인터뷰하는 김정곤 소장. 그는 비트윈스페이스를 ‘사람의 기분과 행동’을 디자인하는 회사로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롱블랙